신체는 가림이 없고 드러난다
나는 어떤 사고를 할 때 신체성이 따라 붙는 경우가 많다. 신체가 구성되고(공생적. 체외장기. 키메라), 작동하는 방식과 삶이 구성되고(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측면), 작동하는 방식과 동일한 패턴이라고 인지한다.
신체는 한 존재의 근원적인 출발점이다. 태고의 것, 원시의 것. 이런 이미지는 다시, 본능, 사회 문화적으로 가려지는 일종의 ‘저급한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신체는 가림이 없고 드러난다.
(옷을 덮지 않고 있는, 놓여진 신체는 상태를 드러낸다.)(‘노출되는 것’이 덮거나 가리는 것 이전의 상태이다.)(노출됨은 생존에서 취약하다. ‘어떤 것’-사람, 몸-의 상태의 기본은 강함이 아닌 취약함이다.)
신체는 기본적으로 키메라의 형태다.(키메라의 형태인 것, 내 안에 내가 아닌 것들을 품고 사는 것 역시 일종의 노출된 형태.) ‘나’와 ‘내가 아닌 것’이 명확히 구분지어지지 않는다. 내가 아닌 것을 품고, 그들과 작용하는 내가 바로 ‘나’이다. 기본적으로 ‘다른 것’을 품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몸이 된다. 다세포 생물을 가능케한 미토콘드리아의 탄생, 몸 속에서 건강(상태)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마이크로바이옴, 수 많은 균과 바이러스, 피부 표면의 것들. 넓게 나아가서는 기존에 타자였던 생물을 섭취하며 나를 이룬다.(이런 측면에서 또 태고와 원시. 그리고 일종의 저급한 것이 떠오른다.-가리려해도 가려지지 않는 생존을 가능하게하는 매커니즘, 다른 것의 생존을 저해하는 섭취-이에따라 삶은 항상 전쟁과 같은 상태로 체감됨.)
위와 같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면 삶은 일종의 공동체로 진행됨을 체감할 수 있다.
(삶에는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도록 구멍이 나있다. 신체에는 다른 존재들을 받아들이고, 넘나드는 구멍이 나있다. 그로테스크의 표현을 이런 부분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한 개인의 역량이 줄어들어도, 이러한 신체의 기본적인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체를 떠날 수 없다. 신체를 기반한 감각은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신체를 단련하고 역치를 높여가는 과정은, 개인이 삶에서 마주하는 여러 상황을 개진해가는 방식과 닮았다. 부서지고 쌓아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 근육을 상처내어 더 비대하고 강한 근육을 얻는 점진적 과부하와 같이, 삶을 개진해가는 것 역시 여러 역경을 겪으며 단단한 사람이 되어간다.
내 작업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은 앞서 기술한 특징들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숨 쉰다’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강하게 와닿았던 대상들다. 그 자체들이 가진 생태적 기질•기작 자체에서 온 인상과, 내 삶을 꾸려가며 마주하게되는 나와 대상의 관계에서 느끼는 인상이 혼합되며 소재로 부상한다.
몸 안에 든 존재로서 인간은 유한하다. 개인이 개진해갈 수 있는 삶에는 분명한 한계(신체적•상황적)가 있다. (다만 인간은 태도를 선택한다.) 이러한 인간의/신체의 특징에 말미암아 다시 ‘원시’와 ‘태고’가 등장한다.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은 여전히 유한하다. 유한해야 인간이다. 무한하고, 거대하길 기대하는 것-태양, 신격화된 동물 등-에 욕망을 투영하고 기원한다.
내 작업에 등장하는 일부 소재들은 완전한 신은 아니나, 살아감에 필요한 ‘강함’의 부분적 특징이 두드러져 작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존재이다. 또는 바라는 방향으로 함께 가는 동료처럼 등장하는 존재이다.